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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천재가 만든 명품 브랜드. 생로랑(SAINT LAURENT) 이야기

천재가 만든 명품 브랜드. 생로랑(SAINT LAURENT) 이야기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 혁명가'

 

 

 

기업명 : Yves Saint Laurent

설립 연도 : 1961년

설립자 : 이브 생 로랑

업종 : 패션, 화장품, 잡화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 이야기

 

 1936년 8월 1일, 이브 생 로랑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났습니다.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받으면서 자랐던 기억이 훗날 특유의 색감과 에스닉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극장과 보험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태어난 이브 생 로랑은 어릴 때 부터 극장의 무대 의상도 많이 보고, 어머니의 패션 잡지도 많이 보는 등 예술과 문학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보면서 자신도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고 종이 인형에다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히고, 패션 잡지의 모델을 오려서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히고 어머니의 옷을 잘라 다양한 소재로 옷을 만드는 등 남다른 아이였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다정한 부모님, 여동생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반면 학교에서는 연약한 몸과 소심한 성격으로 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이브 생 로랑은 17세에 부모님의 독려로 디자인 콘테스트에 응모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레스 부문에 출품을 해서 3등을 했습니다. 이때 심사위원은 무려 '크리스찬 디올', '위베르 드 지방시' 라고 합니다. 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파리로 가는데, 이브 생 로랑의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키우기 위하여 한 사람과 만날 기회를 만들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파리 보그의 편집장, '미셀 드 브뤼노프' 였습니다. 미셸 드 브뤼노프는 이브 생 로랑에게 재능을 키워 패션에 대한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고, 이브 생 로랑은 이듬해에 다시 파리로 건너가서 디자인 콘테스트에 다시 한번 참가를 합니다. 그 때가 1954년 입니다.

미셸 드 브뤼노프

 

 두 번째로 참가한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이브 생 로랑은 1등을 하게 됩니다. 당시 심사위원은 '위베르 드 지방시', '피에르 발망' 입니다. 당시 드레스 부문 1등은 이브 생 로랑이, 코트 부문 1등은 샤넬의 유명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거머쥐게 됩니다. 

 

칼 라거펠트

  

 그 이듬해에 이브 생 로랑은 브뤼노프에게 자신의 디자인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본 브뤼노프는 너무나 놀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찬 디올이 자신에게 보여줬던 디자인이 있는데 그것과 매우 유사하였다고 합니다. 브뤼노프는 나중에 그 순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내 평생을 살면서 그런 재능은 본 적이 없다."

 

 

  브뤼노프는 디올에게 이브 생 로랑을 소개해주고, 디올도 그의 재능을 높히 여겨 19살의 이브 생 로랑을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고용했습니다. 둘은 좋은 호흡으로 서로를  발전시키며 돕고 의지하며 일을 했지만, 불과 2년만에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브 생 로랑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브 생 로랑이 50세쯤에 "디올과 일한 것은 기적이 현실로 이뤄진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에게는 디올이 큰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난 후, 디올은 21세의 젊은 청년 이브 생 로랑을 디올의 후계자로 낙점합니다. 그 후 첫 번째 쇼에서 부드러운 실루엣의 트라페즈 라인을 선보이면서 극찬을 받고 대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트라페즈

  그렇게 이브 생 로랑은 잘 나가게 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그것은 비싼 디올 의상을 살 수 있는 고소득층이 아닌 거리의 젊은이들에 대한 의상이었습니다. 기존 귀부인들의 의상을 다루곤 했던 것과 달리 어두운 색상을 쓰거나 악어 가죽을 사용한 재킷을 만드는 등 새로운 옷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도전은 기존 고객들에게 외면을 받습니다. 고객이 점점 멀리하게 되어, 그동안은 디올의 원래 주인인 '마르셀 부삭'이 이브 생 로랑의 징집을 막아 줬었는데 어느 순간 막는걸 놓기 시작합니다. 이브 생 로랑은 참전을 하기 위해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대를 한 이브 생 로랑은 곧바로 신경쇠약에 걸려 병원에 입원을 하고 이때 받은 충격 때문에 훗날 약물과 알콜 의존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후,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참고로 나중에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게 자신을 쫓아낸 것에 대한 소송을 걸어 거액의 배상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디올에서 쫓겨난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브랜드를 차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생긴 브랜드가 바로 <입생로랑>입니다.

 

입생로랑의 카산드라 로고

Yves Saint Laurent,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YSL로 카산드라 로고도 제작합니다. 1962년 입생로랑의 첫 컬렉션이고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파리 패션쇼에서 끝나자마자 환호와 찬사를 받게 됩니다.

 

"샤넬 이후 최고로 아름다운 컬렉션이다"

"디올의 황태자가 드디어 왕좌에 올랐다"

 

  이후 선원들의 두꺼운 모직코트에 착안한 여성용 코트를 만들어 내놓기도 하고 향수, 몬드리안과 팝아트를 오마주한 드레스 등을 내놓으며 계속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이브 생 로랑은 경제적 풍요로움이 확산되며 귀족이 아닌 평범한 여성들도 잘 차려 입고 싶다는 니즈를 잘 파악하고 그 흐름에 올라타 1966년에 오뜨 꾸뛰르 출신으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기성복 라인, <생로랑 리브고쉬>를 만듭니다. 아주 비싼 라인이 아닌 사이즈만 맞으면 입을 수 있는 기성복 라인입니다. 이 라인 덕분에 매출이 급등하게 됩니다. 또, 여성들을 위한 턱시도를 만듭니다. 여성들의 바지 정장이 나온 것이고, 이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게 회심의 여성용 바지 정장 때문에, 입생로랑은 오뜨 꾸뛰르에서 딱 한 벌만 팔리게 됩니다. 그런 반면에 생로랑 리브고쉬. 기성복 라인에서는 엄청나게 팔리게 되고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샤넬은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입생로랑은 여성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입생로랑은 향수, 기성복 등으로 몸집이 점점 커졌지만, 그만큼 위기도 함께 커지게 되었습니다. 몸집이 커지면서 라이센스를 너무 남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입생로랑 브랜드 가치가 점점 떨어지게 되었고 명품의 이미지가 휘발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매출 급하락 등 위기가 맞물리면서 1991년~1992년 1년 상반기 매출이 1/18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기를 거치면서 입생로랑의 기성복 라인은 '구찌의 PPR그룹'(훗날의 케링)에게 넘어가고 입생로랑에게 남은 것은 오뜨 꾸뛰르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이브 생 로랑은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 물러난 이브 생 로랑은 2008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입생로랑을 품은 구찌의 PPR그룹(훗날의 케링 그룹)은 2000년대 초반에 170개에 달할 만큼 남발했던 이 라이센스 사업권을 열개 가까이로 줄이고,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톰 포드', '에디 슬리먼', '안토니 바카렐로' 등에게 브랜드의 디자인 책임을 맡깁니다. 에디 슬리먼이 브랜드 이름을 <생로랑> (SAINT LAURENT)로 바꾸면서 완전히 브랜드 가치가 되살아 났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생로랑의 앰버서더 블랙핑크 로제

 

 오늘은 21세 젊은 나이에 패션계를 사로잡은 프랑스의 천재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봤습니다. 앞으로도 더 재밌고 유익한 브랜드의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